유대교의 율법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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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예수의 죽음을 속죄의 죽음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들 자신이 율법으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운 생명으로 충만한 경험을 하게 되어 그들의 생각을 넘어,
예수의 생애가 그들을 격려하고 이끌어 주는 약동적인 삶의 방식을 맛볼 수가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들에 있어 분명히 하나의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사건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같은 새로운 사건에 눈을 떴을 때, 그들은 율법이나 신전제의(神殿祭儀) 등으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진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이미 율법이 복잡하고 번잡한 계율체계가 돼버려, 율법을 엄밀히 지키는 것이야말로
여호와의 축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혁명적인 생각을 가진 예수를 따라
당시 율법의 의미를 알아보자.
신전제의(神殿祭儀)에 관련된 여러 가지 규정을 합하면 지켜야만 되는 조항이 613개나 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율법에 대해서 이념적인 이해는 그러한 율법주의적인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상태에 있었을 때, 여호와가 모세를 일으켜 그들을 소위 [무조건]
구해내 주었다는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여호와는 하나의 한낱 약소민족에 불과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여 무조건 축복을 내려 주었다.
그러한 축복받은 상태에서 살아가도록 백성들과 계약을 맺고, 그 삶의 구체적 지침으로서 율법을 주었다.
그래서 율법은 축복의 조건으로써 받은 것이 아니고, 이미 무조건 받은 축복 속에 백성들이 감사하면서
살도록 하는 자애와 진실에서 나온 지침이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시편 19;8~11>
율법이란 법률과 같은 말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지금의 법률에 대해 위와 같이 기쁘고 순결하며, 사모하고 꿀보다 달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법률에 대한 이상적인 이해는 법률이 소위 어린아이를 무조건 사랑하는 엄마가,
자기 아이가 축복받은 상태로 살도록 아이에게 주는 훈계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엄마는 자기 자식을 무섭게 벌주고, 괴롭히기 위해 여러 가지 계율을 정해 주지는 않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가 아프거나 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위험한 일 등에 주의를 주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가 그것을 지키지 않아서 상처를 입었을 때, 꾸짖더라도 미워서 혼내기 보다는,
놀랍고 안쓰러워 바로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꾸짖는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 율법은 소위 그런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시편 19장처럼 노래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교에서는 점점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것만이 축복의 조건이라는 생각이 강해져서,
율법을 엄격히 지키지 않으면 여호와로부터 저주받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율법은 위 시편 19장처럼 기쁨과 감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공포의 계율로 변질돼 버렸다.
율법은 세밀(분)화되어 그것이 613개 조항이나 요구되면서 무서운 벌을 가하는 계율이 돼버린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규정하고 억압하는 괴물로 변모해 간 것이다.
이때 예수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나아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따랐을 것으로 추측하기엔 어렵지 않다.
종교적 신앙은 대화를 멈추게 합니다.
종교(기독교)는 믿음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계획적으로 금지된 유일한 분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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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이라 현자우자님의 글을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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