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무식해서 이뤄진 대선 결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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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이라도 학생들이 멀쩡하게 다니고 있는 학교를 강제로 이전 시킨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교 측은 당연히 반대하고 나섰지만 정권의 설득과 합의 끝에 결국 1976년 경기고가 첫 번째로 강남으로 이전했다. 강북 경기고 부지는 이후에 정독도서관으로 변신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78년에는 휘문고가 경기고의 뒤를 이어서 강남으로 내려왔다.
1978년에는 대통령이 직접 '강북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할 경우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하겠다'고 말한다. 철권을 휘두르던 박정희 정권의 말기였으니 학교 측도 계속 반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80년에는 숙명여중고와 서울고, 1984년에는 중동고가 강남으로 각각 이전한다. 이렇게 해서 강남 8학군이 조성된다.
백 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나의 모교인 배재중고교도 1984년에 중구 정동에서 강동구 명일동으로 이전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변두리로 내려오게 된 당시 학생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학교 이전 문제에 있어서 학생들의 의견 수렴 같은 것은 아마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8학군에서 명문대학 합격자의 수가 많아지자 위장전입의 문제가 생겨났다. 위장전입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녀의 교육 문제다.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해서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위장전입이라는 범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편으로는 워낙 자주 거론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위장전입에 대한 불감증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위장전입도 그렇지만 8학군 자체도 나름대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자녀들을 좋은 대학으로 보내려는 학부모들이 자녀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강남으로 이사 오기 시작한 것이다. 입학 정원을 초과해서 학생들이 전입해 들어오기 때문에 한때는 서울시내 과밀고교의 절반이 강남지역에 몰려 있을 정도였다.
35년 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현대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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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대한민국 고대사가
중요한 이때, 고대한성백제 유적이 지천
에 깔려있었던 고대한성백제의 수도였던
강남,,,,
그곳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대한민국 고대사의 중요성이 나날이
높아지는 이 때. 서해바다를 자신의 앞마당 처럼 여기며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고대 한성백제의 실체는 그 유적과
기록의 적음으로 인하여 실체 파악에 어려움이 많다. 그리
하여 오늘날 고대 한성백제 유적의 중요성은 두말 할 나위
가 없다. 그런데 이 고대 한성백제의 중심지가 바로 오늘
날 강남일대 였다.
강남 8학군과 뭉개진 한성백제 유적
▲ 아시아의 로마제국이였던 고대 한성백제의 영역
‘강북의 눈물’ 위에 핀 강남8학군
[한겨레]
70년대 개발정책으로 명문고 15곳 강제이전
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 등 일부 대학이 올해 수시 모집에서 우대를 해준 것으로 확인된 이른바 ‘강남 8학군’은 사실상 강북의 ‘희생’ 위에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과의 군사적 충돌을 의식했던 1970년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서울 시민들을 한강 이남으로 대피시키는 것을 국정 과제의 하나로 삼아 자연스럽게 강남 개발을 시작했다.
강북 억제책은 1972년 2월 양택식 당시 서울시장이 종로구・중구・서대문 지역에 나이트클럽・술집・다방・호텔・여관 등 각종 유흥시설의 허가와 이전을 금지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시작됐다. 서울시의 이런 조처는 강북의 기존 시가지 2826만평에 제조업체・백화점・도매시장・학원・대학의 신・증설을 금지하는 ‘특정시설 제한구역’ 제도로 이어졌고, 서울시는 4대문 안에 이들 업소의 허가 신청을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조처에도 인구가 옮겨가지 않자 정부는 강북 명문 고등학교의 강남 이전 카드를 빼들었다. 72년 10월 문교부 장관은 종로구 화동(지금의 정독도서관 터)에 있던 경기고를 강남구 삼성동 91 일대(3만2253평)로 옮기는 계획을 발표했고, 동문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76년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어, 정부는 서울 강북지역 학교의 신설・확장 금지(74년), 서울 4대문 안 입시학원의 4대문 밖, 강남 이전 유도(76년) 등의 조처를 잇달아 쏟아냈다. 70년대 이후 도심에서 이전한 학교 20곳 가운데 15곳이 강남・서초・송파・강동 등 이른바 강남권으로 옮겼다.
길윤형 기자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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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김태식 기자
서울 강남구 삼성동 경기고등학교 건물이 들어선 자리에는 원래 토성이 있었다. 야트막한 산을 두른 이 토성은 이것이 있는 장소를 따라 삼성동토성이라 일컬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성벽 은 350m 가량 남아 있었다. 애초 성벽은 그 둘레가 460m 정도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70년대 초반 이곳을 답사했던 윤무병 전 충남대 교수는 이곳에서 한성백제 시대(BC 18~AD 475년) 기 와 몇 조각을 줍기도 했다. 그 동쪽 2㎞ 쯤 떨어진 한강변 풍납토성처럼 성벽을 흙으로 쌓아올렸고 기와조각까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백제 유적임은 분명했고 더구나 기와건물까지 있었음에 미 뤄 백제가 이곳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성동토성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종로구 정독도서관 자리에 있던 경기고 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다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한성백제를 깔아뭉갠 곳에서 과연 학생들에 게 '우리 문화를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 있을지... 어떻든 귀중한 한성백제 유적 1개는 이렇게 해 서 뚝딱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한강 북쪽과 맞닿은 뚝섬 경마장 자리에는 1916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토루(土壘)의 대부분이 남아 있었고 강동구 암사동 소산 이라는 해발 88m 야트막한 산에도 역시 토루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파편조차 찾을 수 없다. 지구상에서영영 사라진 삼성동토성에 비하면 풍납토성은 나은 편이다.
비록 성벽을 포함해 22만 3천평이나 되는 넓은 땅에 벌집처럼 빽빽히 들어선 아파트와 연립주택,상가에 짓눌려 신음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숨통은 붙어있기 때문이다. 삼성동토성처럼 아예 사라진 한성백제 유적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물론 백제 멸망 이후 한강 일대를 차지했던 고구려와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유적이 파괴됐을 것이다. 하지만 서기 475년 한성백제 멸망 이후 1960년대 서울 강남 일대에 개발 바람이 불기까지 무려 1천 500년 동안 진행된 파괴는 그 이후 40년 동안 있었던 파괴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한성백제 중심지인 송파구,강동구,강남구 일대는 이미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마천루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그 지하에서 1천500년을 잠자던 백제 유적을 파괴하고 말았다.
이렇게해서 겨우 살아남은 한성백제 유적이라고는 그나마 잘 정비된 몽촌토성과 뼈대만 남은 풍납 토성, 그 맞은편 아차산성, 석촌동고분군 정도 밖에 없다. 이 중 몽촌토성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파괴 일로에 있다. 백제 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에도 대단히 중요한 아차산성은 곳곳에서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초기백제 유적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석촌동. 가락동 일대 고분군. 1917년에 나온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석촌동 일대만 해도 돌무덤 66기, 흙무덤 23기의 총 89기 나 되는 백제 고분이 있었다. 이 중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나마 기단있는 돌무덤 4기를 가까스로 건져 지금은 이 일대 1만7천평을 사적공원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이들돌무덤은 장군총이나 태왕릉처럼 전형적인 고구려식 모양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초반에는 이들 무덤 주위에서 기와조각까지 발견돼 백제 당시에는 무덤 위에다가 사당 건물을 세워 제사를 지냈음이 이형구 선문대 교수에 의해 확인됨으로써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나머지는 거의 다 사라졌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남위례성터냐 아니냐 하는 논쟁을 넘어 풍납토성이 왜 꼭 보존되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문화유적 보존가치를 꼭 희소성이라는 경제학 원리로 따 질 수만은 없겠지만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 여부를 떠나 몇 군데 남아있지 않은 귀중한 초기백제 유적 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보존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200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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